하루나와 키스를 나눈 직후로 나는 그에게 선배라고 부르기를 그만뒀다. 하루나는 내게 선배 소리를 들을 자격이 없는 인간이다. 선배답지 못하게 이기적이고, 기분파인데다가, 귀엽지도 않다. 하루나 역시 나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남자답게 그에게 좋아한다는 내 마음을 확실히 전했다. 하루나는 나에게 귀엽다고도, 멋있다고도, 좋아한다고도 말해준 적 없다. 부끄럽다면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도 고백하는 방법이 많이 있다는 걸 알텐데, 하루나와 메일을 나눠본 적이 없다. 심지어는 그런 표정조차 간접적으로 보여준 적 없지만, 그런 건 대개 눈치로 아는 법이다. 하루나가 나에게 관심이 생겼다는 것을. 그렇게 말하지만 사실 나는 아직 누구와도 사귀어본 적 없다. 스스로의 감정의 변화에는 눈치가 빠를 뿐이다. 그리고 내가 당당히 고백했던 것에 대해, 하루나는 대답은커녕 비겁하게 도망치기만 했다. 그런 주제에 하루나는 나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키스했다.
나는 그때 당시의 상황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잘만 연습하던 하루나가 대단히 열이 받은 얼굴로 타카야! 하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내게 달려왔고, 몸집이 큰 하루나를 마주하게 된 나는 순간 쫄았지만 자존심을 부리느라 퉁명스레 왜요, 하고 대답했다. 하루나는 끙… 하더니 갑자기 내 뒷목을 잡고 입술을 부딪혔다. 나는 새파랗게 질려 이 자식이! 하고 그를 밀쳤지만 그는 끈질기게 나를 제 품에 가뒀다. 나는 그보다 키가 한 뼘 정도 작았고, 체구도 작은 편이었기 때문에 그를 떼어내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나는 그를 떨어뜨리려 노력하는 대신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는 당신 뭐하는 거야! 라고 그에게 소리쳤다. 입술을 벅벅 문지르고 바닥에 침을 확 뱉고 나서 하루나를 노려보자, 하루나는 오히려 적반하장의 말투로, 뭐야 별 거 없네, 라고 빈정거렸다. 네 고백 때문에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아. 나는 그제서야 뒤늦게 주위를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내 더러운 성질에 그를 가만히 둘 수 없었다. 하루나가 비웃든가 말든가 그를 힘껏 걷어차고 도망쳤다.
투수란 놈들은 원래 이렇게 다들 제멋대로인가? 라고 한탄하며 나는 하루나를 떠받드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이렇게 된 이상 그를 투수라는 카테고리에 간단히 묶을 수는 없다. 투수라는 것들의 공통분모라곤 짜증난다는 것밖엔 없지 않은가. 하루나는 그보다 한층 더 복잡하고, 알기 어렵고, 짜증나는 존재다.
이 남자가 원래 요령이 좋지 않다는 사실-남의 입으로 들으면 기분 나쁠 것이 분명하지만, 특히 나에게는 더-은 알고 있다. 오히려 실은 굉장한 노력파라는 걸 알기에 짜증이 나는 것이다. 충동적으로 일을 저질러버리는 남자가 아니기에 이 성추행에 가까운 행동이 불쾌하다는 것이다.
야, 타카야 잠시만! 자율연습을 끝내고 집으로 가려는 나를 불러 세운 하루나가 다시 한 번 내게 키스하려 했다. 이번엔 잘 피했지만 하루나의 싸늘한 눈빛이 내 몸을 뜨겁게 옭아맸다. 이번엔 또 뭐야? 하루나가 귀찮은 여자애 대하듯이 나를 대했다. 무시당하는 느낌. 나는 자존심이 상했다.
당신 대답 들을 때까지 가까이 가지 않을 거니까.
아, 그러셔. 그거 고백이었구나. 내 허락도 없이 멋대로 지껄인 거.
고백을 누구 허락받고 합니까?
나지 누구야. 그럼 너 앞으로도 내 공 안 받고, 나랑 어울려주지도 않고, 심지어는 내 얼굴도 안 볼 거냐? 타카야 혼자 잘 먹고 잘 살면 되겠네. 코시엔 우승도 하고 말이야. 나 좋아한다면서 그렇게 말하기가 쉽네, 너.
이 쪼잔한 놈. 멱살을 잡으려다 상황이 악화될까 싶어서 가까스로 참았다. 하루나는 여전히 재수없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해줄 때까지 저러고 있을 셈인가. 그러나 하루나만 고집이 센 게 아니다. 나도 부모를 닮아 고집은 꽤 센 편이다. 저쪽에서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다. 오늘이야말로 저 고집을 꺾어줄 테다.
타카야 좀 너무한다는 생각 안 들어?
제가 뭘요.
내가 너한테 손 빌려달라는 것도 아닌데. 아, 물론 난 너처럼 게이가 아니지만. 고등학생씩이나 됐으면서 아직 그런 거 멀리 하냐? 고작 키스나 해주면서.
...포수랑 투수는 부부나 마찬가지라는 거 너도 알지? 내가 마누라랑 화해를 해야 능률도 올라갈 거고. 공도 더 많이 던질 거고.
마지막 건 거짓말이네요. 그리고 주위에 귀여운 여자애들 많을 거 아닙니까. 선배 인기 없는 것도 아니고.
그치만 네가 내가 좋다잖아. 여자애들은 징징대서 싫어.
당사자들이 들으면 참 좋아하겠네요. 저 위하는 척은 하지 마세요. 본인이 귀찮아서 그러는 거잖아요? 그리고 전 엄밀히 따지자면 게이는 아닌데요.
아- 알겠어. 타카야 말 진짜 많네!
말 많은 게 누군데.
그러고는 한다는 말이,
“야. 너 땀냄새 난다.”
젠장, 이 자식은 도무지 배려란 걸 모르는 놈이다. 남자 애니까 배려따윈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그러나 그건 큰 오산이다. 사람을 상대할 때는 항상 교양 있는 자세를 지켜야 한다. 그게 매너란 거다. 그렇게 행동하도록 부모에게 교육 받았을 텐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내 몸에서 나는 불쾌한 체취를 없애느라 쩔쩔맸다. 이런 게 바로 투수란 놈들을 대처하는 나의 비굴한 생존법이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나코우] 겨울 조각글 (0) | 2019.12.1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