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사카타 긴토키’ 라는 남자는 가부키초의 어느 스낵바의 남주인, 이 아닌 그 위층의 해결사 사무소에 마치 기생충처럼 세 들어 살고 있다. 함께 기생하는 카구라(부녀도, 남매도, 연인 사이도 아닌 주제에 동거라니 중매가 오가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 신파치(아르바이트는커녕 아이돌 오타쿠질에 돈을 냅다 들이붓는), 그리고 사다하루(하루 먹이만 이십 킬로그램이 넘는다) 라고 하는 자들과 살벌한 일을 맡아 해결해주는 것이 주요 업무지만 보수를 받아본 적이 손에 꼽는다. 한심한 농을 주고받는 일이 그야말로 ‘일’ 인 셈이다. 해가 저무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애들이나 볼 법한 만화를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나면, 끝이 헤진 소파에 누워 늦잠을 자곤 한다. 게다가 달디 단 파르페를 매일같이 입에 달고 산 탓에 당뇨가 위액처럼 목구멍까지 역류할 정도라니 이번 생은 건강은커녕, 제 몸을 마치 타인 보듯이 하고, 어느 구석 하나 제대로 살피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했다. 어디 연을 부탁할 지인이라곤 아래층 스낵바의 진짜 주인인 오토세 부인뿐이라 인복 없지, 인복 없어 하며 맥없이 중얼대는 그에게도 실은 단 하나의 절개節槪가 있다.
「내가 알고 지내던 사무라이란 남자는 죽어버린 모양이지.」
사마귀의 뒤꽁무니 마냥 무섭도록 날카로운 검의 끝이 쭈그려 앉아 놀이의 술래를 보던 사카타의 머리를 목표로 겨눠졌다. 순식간에 위기를 느낀 사카타의 손이 허리춤에 찬 목도를 향해 꿈틀하기에 앞서 고개가, 이성보다 먼저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챈 본능이 뒤돌았다.
사라락. 사포조각을 어루만지는 듯 거칠거칠한 사카타의 머리카락이 잘려나간 흔적은 민들레 홀씨가 아무렇게나 흩뿌려진 흑지黑紙다. 기척 없이 어두운 골목에서 불쑥 뛰쳐나와 망설임 없이 사카타를 베어버린 그 녀석이 기둥이고, 녀석보다 앞에서 휘날리는 자신의 것들이 잔해가 된다.
「마을에서 아이들이나 놀아주고 있다니 네 녀석의 이야기는 여러 곳에서 익히 들었다만, 정말로 그 긴토키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놈이 되었구나. 스승놀이라도 하는 거냐.」
「…」
「사무라이의 숨이 어디 함부로 죽을 터냐.」
「이게 누구시더라? 다카스기 군 아니야. 여전히 패션 센스는 꽝이구만. 보라색 기모노는 아니지, 아니야. 팬티 색도 같은 건 아니겠지, 다카스기 군.」
수염이 조금 더 굵어지고, 더 자주 깎아야 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열여덟 사카타나 스물여덟 사카타나 별 다를 게 없었다. 거기 털은 날까 싶은 여덟의 민둥산 사카타도 어쩌면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비치된 나무 의자에 누워 벌레 소리를 벗 삼아 코를 후비적대고 있을지 몰랐다. 그 시절의 기억은 사카타에게 그리 뚜렷하지 않았고, 거의 잔상처럼 희미하게만 남아 있다. 그런 여덟의 사카타를 거둬준 스승은 다 낡아 쓰러져가던 도장을 운영했다. 스승과의 십 년. 그가 병으로 죽은 후엔 순조롭게 그의 주위 친척들이 땅을 빼앗고 문하생들을 차례로 몰아내어 떠밀리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 절망시대에 마주친 누군가를 기다린 것만 세보아도 손가락으로 열 개 째. 또 십 년이다. 애석하게도 미처 제게 돌아오지 못한 스승에게로 인도하기 위한 자는 아니다. 여름의 더위를 막무가내로 먹은 탓에 보이는 환상일까. 다카스기 신스케가 도깨비처럼 눈알을 굴리고 태연히 서 있었다.
「이렇게 약해빠진 네 놈을 내 품으로 데려오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 걸. 예의 벗을 오랜만에 보니 어떤가. 아무래도 기다린 보람이 있는 몰골이 아닌 걸 그래.」
「어이, 십 년 만에 나타나서 할 얘긴 아니지? 이 긴 씨는 이미 다카스기 군에 관한 건 전부 기억에서 지워버렸답니다.」
「마음이 상했군.」
「그래도 기억나는 게 하나 있지.」
사카타가 다카스기를 향해 달려들었다.
다카스기 신스케는 도장의 문하생 시절부터 두뇌가 비상했고, 승부에 능했고, 누구에게도 지기를 싫어하며 검술과 전술은 가히 최고라고 불려, 서방西方의 다카스기를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일부에선 다카스기를 보고 겉보기엔 매혹적이지만, 속을 알 수 없는 ‘뱀’ 혹은 가까이 할 수조차 없을 ‘용’ 같은 남자라 부르며 질투를 일삼았으나 날로 성장하는 그에겐 그 모든 것이 그저 소문을 부풀리기에 좋은 거름이 될 뿐이었다.
사카타의 검술이 점차 추종자들을 불러들인데 반해, 다카스기의 검술은 상대를 찾아가 습격하여 승기를 거머쥐고야 마는 검법이었다. 다카스기는 기어코 소문이 무성한 동방東方의 사카타를 찾아냈다. 마침 숙식하던 도장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사카타에게 싸움을 걸어 처음으로 대패하고, 그 첫 만남 이후 두 사람은 기묘한 관계가 되었다. 사카타는 처음 보자마자 자신을 대뜸 죽이러 달려든 다카스기에게, 다카스기는 태어나 처음 패를 안겨준 사카타에게 살의와 함께 뭔가 다른 것을 느꼈다.
「나와 함께 가자.」
다카스기는 손을 내밀었다.
다카스기는 사카타를 거뒀다. 받아줄 곳 하나 없는 떠돌이가 된 사카타의 처지에서 비롯된 연민 때문은 아니었다. 다카스기가 낯선 곳에서 씻지도, 편히 잠들지 못 하는 그에게 동정심을 느낀 것도 마찬가지로 아니었다. 누구도 그를 데려가도록 두기엔 다카스기의 자존심과 복잡한 감정이 허락하지 않았다. 다만 제 손으로 그를 죽이기 전까지 곁에 두기로 했다.
외로운 두 사람은 자주 입을 맞추기도, 볼을 쓰다듬기도, 가끔 한 이불을 덮기도 하였으나, 상호 마냥 사랑스러운 연인은 아니었다. 다카스기는 더 이상 사카타를 상대해주지 않았고, 때문에 사카타의 검은 무료해졌다. 하지만 동네의 도장 어느 곳에도 그를 취직 시켜주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다카스기가 자신의 일을 돕도록 시키지는 않았다. 사카타가 「네 녀석은 나를 가지고 뭘 할 셈이냐. 정말 시원하게 네 뒤만 뚫어주는 놈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바엔 저 아랫동네 아저씨를 부르라고. 나보다 나을 테니까 말이야.」라고 비아냥대도 돌아오는 것은 다카스기의 비웃음과 뒤통수. 심술이 난 사카타가 이곳저곳에서 사고를 치고 다녀도 다카스기는 그 뒷일을 수습하곤 말았다. 사카타가 단지 막부를 치려는 다카스기의 밤일을 돕는 남자라는 소문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사카타를 만나고 나서 다카스기는 이름만 들어도 알만 한 사람은 아는 명문가의 첩의 아들에서, 삭막하고 미래가 없는 그곳을 도망쳐 나온 미래의 혁명가로 일컬어졌다. 탓에 주머니 사정이 여유로울 리가 없는 그가 사카타를 슬하에 두고 여관에서 함께 생활한 것이 일 년, 다카스기는 사카타에게 돌연 혁명을 제안했다. 시기적으로는 다카스기의 금고가 어느새 텅 빌 때 즈음이었다. 그것은 얼핏 보기엔 그저 제의라기보다는 고지告知에 가까웠다.
「네게 편히 쉴 수 있는 곳을 안겨주마.」
「그거 혹시 무덤? 제 발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거냐.」
그 날도 사카타는 다카스기에게 영원을 맹세했다. 「오늘도 막부 놈들한테 쫓겼냐.」 「여느 날과 다를 리 있겠나.」 「가까이 오지 마라. 목 막힌다.」 사카타는 밖에서 먼지를 몰고 돌아온 다카스기의 자줏빛 머리에 애틋하게 손을 얽고, 불퉁한 말을 뱉어냈다. 다카스기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사카타의 품에 기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카스기의 몸에서 흙이 후드득 떨어졌다. 뺨에 닿은 손가락 근처에서 숨소리가 색색거려 사카타는 다시금 묘한 감정이 고개를 드는 것을 외면할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 역전 같지만, 스스로를 파괴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고군분투 하는 녀석을 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아주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카타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마지막이다. 긴토키, 손을 빌려줘.」
「슬슬 알려줄 때가 되지 않았나? 다카스기, 네 녀석 대체 뭣 땜에 화가 나 풀지 못해서 이토록 안달이야.」
다카스기의 눈동자가 사카타의 목울대를 타고 천천히 올라갔다. 맹독이 묻은 뱀의 혀가 훑고 간 자리는 선명하게 자색 두 선이 그어졌다. 사카타는 침착하게 대답을 기다렸다. 다카스기는 입을 벌렸다.
「개를 방생했지 않은가.」
사카타가 이 낯간지러운 이야기의 의미를 이해한 것은 그로부터 꽤 시간이 흐른 후의 일이다. 다카스기로부터 혁명이 있고 나서, 다카스기의 행방이 묘연해지고 일 년은 그의 생각만을 하였다. 고작 함께 일 년을 지내놓고, 떠올릴 것이 어찌나 그렇게 많던지. 미련한 마음이 그 녀석을 놔주질 않았다. 딱히 일로 바쁘지도 않은 터라, 하릴없이 다카스기가 남긴 말들을 하나씩 되새겨 보다가, 불현듯 하루 허용치를 넘어섰다는 걸 깨닫고는 했다. 이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다카스기가 그렇게 사라지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다카스기는 입을 다문 채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사카타의 무의미한 투정이 허공을 휘날렸다.
「난 이미 마음 바꿔먹은지 한참 됐다니까. 혁명 따위 운운하기 이전에 어른부터 돼라.」
「긴토키.」
「…」
「세상을 바꾸기에 우린 아직도 젊지 않은가.」
사카타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보다 더 굳은 의미의 맹세로 키스를 했다. 다카스기와 만난 순간부터 사카타의 미래는 정해진 것과 다름없다, 사카타는 이미 그리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다카스기도 같은 생각이었다. 다카스기의 몸종이기도 한 사카타의 거절이란 말은 그 자체로 어색했다. 사카타의 일은 그저 수락하는 것이다. 하물며 그에겐 거절할 의사가 있지 않았다. 그 무렵 사카타는 그저 다카스기만의 개로 살아 있었다. 개와 주인의 삶이란 것은 떨어지려야 절대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네 녀석 분이 그걸로 풀린다면 내가 끌려가는 수밖에 더 있나.」
「분을 푼다? 그럴 수도 있겠지. 내가 하고자 하는 건 위의 녀석들에게 화풀이를 하려는 것이니까.」
사카타는 이별을 떠올려 본 적이 없다.
사카타가 드디어 일어선다. 다카스기로부터 흘러나온 사카타의 소문을 듣고 변방의 사무라이 비슷한 자들이 몰려들었다. 다들 현 체제에 불만이 많고 한자리 차지하려는 욕망이 가득한 자들이었다. 이빨 빠진 동방의 사카타도 아직은 제법 쓸모가 있는 모양이다. 그가 홀려온 장정들이 제 몫을, 하다못해 수 맞추기 정도는 제대로 해줄 것이다. 하지만 그들과는 엄연히 목표로 향하는 강도가 다른 탓인가. 조직을 등에 업은 막부를 상대해 그 천하의 다카스기로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막부를 치던 도중 사카타는 팔뚝 한 짝을 날려먹었다. 피가 철철 흐르는 걸 부여잡고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어디에도 다카스기가 없었다. 다카스기와 사카타. 오직 두 사람만이 남았다. 사카타가 있는 반대편에서 큰 폭발음이 들려왔다. 다카스기가 혁명을 실패할 시에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둔 것일지, 막부에서 남은 자들을 한 번에 처리하려고 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폭탄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버린 신체처럼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생사도 모르는 사이가 되었다. 스승을 보낸 뒤로 이런 격동의 마지막은 처음이었다. 눈을 떠도 곁에 아무것도 없는 허무함.
열여덟 무렵에 잡은 건 다카스기의 손이었지.
나는 네가 죽은 줄로만 알았다.
「나를 한 번 더 따르지 않겠나, 긴토키.」
「언제적 얘기를 하는 거냐. 긴 상이 그 시절의 어린 애라고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이제 보니 얼굴이 조금 달라진 거 아냐? 염라대왕님이 어디서 다카스기를 쏙 빼닮은 귀신이라도 데려 온 모양이지. 다카스기인 척 하는 건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요 녀석아. 그 놈은 네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녀석이다. 지금 듣고 있다가 내일이라도 당장 튀어나와 네 놈의 목을 따버릴 지도 모른다고.」
「이미 내 목숨은 잃어버린 것과 마찬가지다. 대답까지 오래 기다려주지 않을 거다. 이미 정해져 있는 것에 흥미 같은 건 없어. 날은 충분할 테지.」
「…귀가 어두운 걸 보니 지옥 문턱까지 갔다가 젊음을 팔고 목숨을 가져온 것 같네. 다카스기 군. 혹시 거기 털이 다 빠진 거 아냐? 수염은 어딨,」
「말이 통하지 않는군. 내가 너에 대해 아는 것과 또 다른 게 있단 말인가?」
「그럼. 이 긴 상은 생각보다 더 어른이 됐어요. 먹여 살려야 할 토끼들이 있어서 그만. 아, 그리고 다카스기, 너 수염은 안 어울릴 것 같다. 늙으면 지긋지긋한 수염도 안 나려나? 아무튼 면도 잘 하도록. 이상.」
「후회하기를 바란다.」
다카스기는 사카타가 멀어져 가는 모습을 이상하리만치 오래도록 담았다. 그리고 평소처럼 그늘을 길게 만들어내는 갓을 푹 눌러쓰고 발걸음을 옮겼다. 다카스기의 나막신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사카타의 귀에 온종일 맴도는 것 같았다.
사카타의 해결사 사무소가 어느덧 겨울을 맞이하면 사정은 더 궁핍해졌다. 주린 배를 부여잡고 몸의 온기에도 데워지지 않는 차디찬 소파 가죽 위에서 뒹굴었다. 일은 딱 말라붙은 고목에 걸린 나뭇잎 수만큼 앙상했다. 가스가 끊기고, 좋아하는 아나운서가 나오는 테레비를 켤 돈도 물론 없었다. 정보 공급원이 생명을 다 하자, 일을 찾아 나서기도 힘들었다. 춥다는 핑계로 방에 틀어박혀 있기 일쑤였다.
그보다 사카타가 가장 신경 쓰이는 건 여름 이후 다카스기의 소식이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희한하게도 다카스기는 옛적부터 그 화려한 기척을 숨기기에 능했다. 그런 차림새에도 불구하고. 십 년을 조용히 지낸 것도 답지 않다. 그 녀석이 정말 되돌아 온 것이라면 징그럽게 주위에서 떠들어대겠다 싶었는데, 아무래도 도깨비인 모양이다. 다행이라고 불러야 할지 어떨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런 사카타의 걱정과는 달리 이듬해 다카스기는 눈가에 안대를 덮고 다시 사카타를 찾아왔다.
「눈을 잃었다.」
다카스기가 사카타에게로 다가와 손을 뻗었다. 허락도 않았는데 멋대로 현관문에서 방까지 걸어올 때. 땅에서 한 발짝씩 걸음을 뗄 때마다 눈을 밟고 온 더러운 흔적이 발바닥에서 떨어졌다. 차라리 기절하여 전부 잊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저를 놀라게 만들려는 심산이라면 성공이라고 사카타는 울부짖고 싶었다. 다카스기가 사카타에게 원하는 후회란 것이 바로 이런 거라면.
나는 아마도 영원히.
주인을 잃은 개가 길거리로 나돌았다. 그것이 상호 최초最初이자 종생終生의 무사도인 셈이다.
은혼
사카타 긴토키x타카스기 신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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